"호국의 넋, 조국의 품에서 편안히 영면하소서"

육군 장병 및 유가족이 故 오용순 일병의 영정과 영현을 안장식 장소로 봉송하고 있다.(사진제공.육군)
육군 장병 및 유가족이 故 오용순 일병의 영정과 영현을 안장식 장소로 봉송하고 있다.(사진제공.육군)

(육군=국제뉴스) 이운안 기자 =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장렬히 산화한 7위의 호국영웅이 영면에 들어갔다.

육군은 19일 국립서울현충원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각각 6·25전쟁 전사자 발굴 유해 합동안장식을 엄수했다.

서울현충원 합동안장식은 박안수(대장) 육군참모총장 주관으로 유가족과 국방부 및 보훈단체 관계자, 장병 등 24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실시되었으며, 같은 시간 대전현충원에서도 고현석(중장) 육군참모차장 주관으로 합동안장식이 열려 호국영웅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했다.

영결식을 주관한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이 조사를 낭독하고 있다.(사진제공.육군)
영결식을 주관한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이 조사를 낭독하고 있다.(사진제공.육군)

행사는 국기·전사자에 대한 경례, 조사, 종교의식, 헌화·분향, 조총 및 묵념, 영현 봉송 순으로 진행됐다.

7위의 호국영웅은 유가족에 요청에 따라 故 오용순 일병은 서울현충원에, 故 김종기 이등중사, 차말줄 일병, 김희선 일병, 류홍석 일병, 김동수 이등중사, 김희정 중위 등 6위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고인들의 유해는 2000년부터 2022년 사이 6·25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전후방 각지에서 발굴되었으며, 이후 유전자 시료 채취에 참여한 유가족 DNA 정보를 통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최종적으로 신원을 확인했다.

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故 오용순 일병의 영결식이 진행되고 있다.(사진제공.육군)
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故 오용순 일병의 영결식이 진행되고 있다.(사진제공.육군)

故 오용순 일병은 전북 무주에서 마을 청년단장으로 활동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참전했다. 8사단 소속으로 ‘의성지구전투’, ‘영천지구전투’ 등에 참가했으며, 이후 1951년 2월 12일 ‘횡성전투’에서 중공군의 4차 공세에 맞서 싸우다 20세의 꽃다운 나이로 전사했다. 여동생 오용이씨는 “70여 년 만에 오빠를 만날 수 있어 기쁘다”며, “오빠의 유해를 잊지 않고 찾아준 국가와 여러 관계자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전했다.

故 김종기 이등중사는 경북 청도에서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던 중 전쟁이 발발하자 아내와 어린 외동딸을 두고 자진 입대했다. 2사단 소속으로 ‘포천-평강지구 인민군 소탕 작전’, ‘영천, 영덕, 울진·영양 공비토벌작전’ 등에 참가했으며, 이후 1951년 9월 2일 중부전선 요충지 확보를 위해 벌어진 강원도 철원군 ‘734고지 전투’에서 중공군과 맞서 싸우다 28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딸 김무순씨는 “국유단에서 연락이 오기 전날 꿈속에서 아버지를 만나 펑펑 울었다”며, “어머니가 한평생 아버지만 그리워하다 돌아가셨는데, 두 분을 합장해서 꿈에 그리던 해후가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故 차말줄 일병은 6·25전쟁 당시 33세의 비교적 늦은 나이로 아내와 어린 남매를 남겨두고 참전했다. 5사단 소속으로 ‘영남지구 공비토벌’에 참가했고, 가평·청평·춘천지구 경비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1951년 2월 8일 ‘횡성-포동리 전투’에서 중공군 4차 공세에 맞서 싸우던 중 34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아들 차성일씨는 “제 생애 아버지 유해를 찾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그저 현충원을 찾아 마음을 달랬다”며, “아버지의 유해를 찾아 험난한 산꼭대기를 수차례 오르내린 군 장병들에게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故 차말줄 일병은 1970년 훈련 중 수류탄을 온몸으로 막아 소대원을 구하고 순직한 3사 1기 故 차성도 중위의 삼촌이기도 하다.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이 고인의 영정에 경례를 하고 있다.(사진제공.육군)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이 고인의 영정에 경례를 하고 있다.(사진제공.육군)

故 김희선 일병은 부인과 어린 남매를 두고 국가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자원입대했다. 8사단 소속으로 홍천, 충주, 제천 등지에서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1951년 2월 12일 횡성전투에서 중공군 4차 공세에 맞서 싸우던 중 25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아들 김성균씨는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아버지가 돌아오시길 한평생 기다리며 눈물과 한숨으로 지내셨다”며, “오랜시간이 걸렸지만 두 분을 합장해 해후가 이루어지도록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故 김희선 일병의 후손은 아들과 손자까지 3대가 모두 병역을 마쳐 2005년 병역명문가로 선정된 바 있다.

故 류홍석 일병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한의사로 활동하던 중 1951년에 입대하였다. 5사단 소속으로 ‘태기산 전투’, ‘인제지구 전투’ 등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1951년 8월 27일 강원도 양구 ‘피의 능선 전투’에서 북한군과 맞서 싸우다 22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여동생인 류영순씨는 “오빠가 저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흔들며 놀아주던 추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혹시라도 오빠가 돌아올까 봐 살던 생가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는데, 오빠의 유해를 찾았다는 소식에 감격해 잠을 못 이루고 눈물이 났다”라고 소회를 전했다.

故 김동수 이등중사는 전남 화순에서 부모님과 농사를 짓던 중 전쟁이 발발하자 나라를 지키기 위해 1951년 19세의 나이로 입대했다. 2사단 소속으로 ‘양구 적근산 735고지 전투’, ‘김화-금성 진격전’ 등 주요전투에 참가했다. 1952년 10월 27일 철원 평야를 확보하기 위한 ‘저격능선 전투’에서 대규모 중공군과 맞서 싸우다 20세의 꽃다운 나이에 장렬히 전사했다. 고인의 친조카 김진훈씨는 “아버지는 생전 큰아버지를 찾기 위해 애썼다”며, “오랜 바람이 이제야 이뤄진 것 같아 가족 모두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고 말했다.

故 김희정 중위는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부사관으로 복무하던 중 전쟁이 발발하자 1사단 소속으로 참전했고, 1950년 9월 5일 ‘가산-팔공산 전투’ 중 현지에서 장교로 임관했다. 이후 보름 만인 19일 경북 칠곡에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던 중 27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고인의 친조카 김창식씨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삼촌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잘 모시게 되어 다행이다”고 말했다. 故 김희정 중위는 전사 후 전투 공적을 인정받아 1954년 은성 화랑무공훈장이 수여되었으나, 유가족을 찾지 못해 훈장이 전달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 2024년 39보병사단 예비군 지휘관이 지역별 전사자 명부를 통해 고인의 조카를 찾아 유전자 시료 채취 및 분석을 권유하면서, 고인의 유해와 무공훈장이 유가족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

이날 박안수(대장) 육군참모총장은 조사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라를 위해 기꺼이 헌신하신 호국영웅님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자유 대한민국은 세계 속의 선진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며, “선배님들의 고귀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확고한 대적관으로 무장하고, 북한이 감히 다시는 도발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억제력을 발휘하며, 유사시 압도적인 힘으로 단호하게 응징하겠다”고 말했다.

육군은 앞으로도 국가를 위해 헌신한 영웅들에게 최고의 존경과 예우를 표하는 한편, 마지막 한 분의 유해까지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방침이다.  

영결식에 참석한 보훈단체 회원들이 고인에 대해 경례로 예를 표하고 있다.(사진제공.육군)
영결식에 참석한 보훈단체 회원들이 고인에 대해 경례로 예를 표하고 있다.(사진제공.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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